불과 얼음의 그녀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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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음의 그녀가 웃는다.

  • 이말순 편집위원
  • 승인 2021.09.27 1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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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솜사탕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금세 상담실 장의자에 길게 눕더니만 한숨을 길게 쉰다.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그녀에겐 항상 만성적인 공허감이 묻어난다.

그러더니만 느닷없이 까악~” 시퍼런 비명을 지른다. 마치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듯,

오늘은 5번째 상담 날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낯설어하더니만 마치 자신의 방에 드러눕듯 편하게 대하고 있다.

선생님이 진짜 최고 좋아요. 뭐든 제 편 인 거 같아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다음번에는 선생님은 최악이라고 말할 것을.

그녀는 마치 허무를 피하려고 쾌락을 흡입하듯 살고 있다. 지난번 상담에서 최고의 애인을 새로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도 오늘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녀는 유난히 정서가 불안정하고 충동적이며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에 가시가 박힌 듯 아파하기도 하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팽창하기도 한다. 같은 동성인 나에게도 어린아이 같은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떨다가도 금세 금속성 목소리로 차갑게 돌변하기도 한다.

오래전 불새라는 TV 드라마가 있었다. 여주인공이 남자를 붙잡기 위해 열대어 어항을 깨고 그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맨발로 걸어나 오는 순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열대어가 파닥거리는 장면이 떠오르게 한다. 그녀는 생의 바닥 위에서 거칠게 파닥거리는 한 마리 열대어다.

가정 폭력 가정에서 자라난 그녀는 간접 폭력 피해자다. 언니가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아빠에게 골프채로 맞는 순간 오줌을 절였던 그녀. 세상 밖을 인식한 후부터 안 맞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하면서 살아왔다. 어쩌면 그녀는 살아온 내내 불안에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맞고 산 사람은 일단 맞은 날은 그날 몫을 다 받았기에(?) 편히 잘 수 있었다고 하니 그런 의미로 본다면 그녀는 매시간 안 맞기 위한 노력을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해왔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권위적이며 폭력적이며 부자로 자신의 행위를 법으로 여겼던 그녀의 할아버지의 판박이였다. 물질만 유산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폭력도 대물림 받은 것이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목을 매고 살아오다가 중1 때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포장해온 삶이 학교 폭력으로 깨지면서 포장된 삶에서 자폭하는 삶으로 변해버렸다. 부모를 위협하기 위한 자살 시도, 친구와 폭력, 주변 남자들로 이어지는 문란한 성관계까지 모든 불편한 구색을 다 갖춘 셈이었다. 그 덕분에 부모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하였다. 걷잡을 수 없는 딸의 상태에 당황한 부모는 그녀를 상담실에 의뢰한 것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경계성 성격장애 자다. 경계성 성격장애 자는 폭력 가정에 많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로 여자가 많은 것을 보면 환경과 유전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에서 발행한 분류 및 진단 절차인 DSM-5는 성격장애를 유사성 정도에 따라 3개의 군(cluster)으로 나누고 있다. A군은 편집성(망상성, paranoid), 분열성(폐쇄성, schizoid), 분열 형(schizotypal) 성격장애로 괴상하거나 엉뚱해 보이며, 주로 정신병원에서 볼 수 있다.

B군은 반사회성(antisocial), 알칼리성(histrionic), 자기애성(narcissistic), 경계성(borderline) 성격장애로 감정적이며 변덕스럽다는 특징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C군은 회피성(avoid ant), 의존성(dependent), 강박성(obsessive-compulsive) 성격장애로 쉽게 불안을 느끼며 두려워하며 주로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 사실 성격장애는 진단 일치율(diagnostic concordance)이 낮다. 진단 일치율이 낮은 이유는 성격을 묘사하는 진단 기준 자체가 모호하고 전문가들은 자신의 견해와 경험, 관점에 따라 다른 성격장애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실례로 2009, 연쇄살인마 강호순을 반사회성 성격으로 자기애성으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마음에 병은 증상이 모호하기 때문에 단정하기 쉽지 않다.

경계성 성격장애 내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축을 잡아주는 것이다. 그녀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버림받지 않은 존재인지를 확인 할 수 있도록 든든한 기둥이 돼줄 사람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격한 감정 표현과 폭력적 행위도 그녀에게는 문제가 된다. 자신의 감정이 올라올 때 신체 감각을 알아차리고 상대에게 소리를 내 표현하는 연습도 진행되었다.

사전에 내담자의 감정 감각을 조사하고 자신의 감정 확인을 하루에 5번 정도 확인하는 연습을 통해 감정 알아차림에 익숙해지면 도움이 된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면

제가 화가 날 것 같아요.” 표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표현은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경고가 되는 것이다. 관찰자로서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며 감정에 매몰되는 것을 막아주며, 상대는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긴 호흡과 함께 멈춤을 요구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실 내담자를 경계성 성격장애로 명명하였지만, 진단명에 고정된 치료법은 없다. 그냥 내담자 증상에 맞게 개별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대처법일 것이다. 진단명에 목을 매다보면 정작 중요한 내담자의 고유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모도 매력적이며 지능도 좋았지만 남자 앞에만 가면 비굴하리만큼 매달리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마치 모든 남자를 아빠로 대치되는 현상을 보인 것이다. 아빠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매달린 것처럼, 지금 만나는 남자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버림받지 않기 위해 매달리고 집착하다 보면 상대 남자는 급속하게 그녀에게 질려서 도망가버리는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누군가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버림받지 않은 존재인 것을 구분하고 확인하는 통찰 작업은 지속하여야 한다. 또한, 그녀 자신이 자신에게 과거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연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약하다. 자신에 대해서 연민이 없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으랴.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단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녀에겐 그녀가 순간순간 흔들려도 여전히 그대로 있을 존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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